지하철 노약자석, 주인 따로 있다?

지하철 노약자석, 주인 따로 있다?

입력 2012-04-08 00:00
수정 2012-04-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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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여름. 임신 9주차로 접어들던 나엄마(32·가명·여)씨는 심한 입덧 탓에 온 몸에 기운이 없었다. 지하철로 이동 중이었던 그는 때마침 비어 있던 노약자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나이가 지긋한 한 할아버지가 나씨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가씨! 자리 좀 양보하지!”, 깜짝 놀란 나씨는 “입덧이 심해 앉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연신 “처녀가 임신한 게 자랑이냐” “배도 안 나왔는데 임신한 걸 어떻게 믿냐”고 호통쳤다.

나씨는 눈물부터 나왔다. 결혼 3년만에 가진 첫 아이였다. 그런데 노약자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이 같은 모욕을 당하다니, 너무 억울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역정에 욕설까지 섞으며 나씨를 나무랐다. 결국 그는 내려야 할 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나씨는 심지어 그 할아버지의 며느리와 손녀도 자신과 같은 수모를 겪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 모범생(22·가명)군은 2년 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당시 모군은 며칠 전 계단에서 굴러 깁스를 하고 있는데다 감기몸살까지 겹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노약자석에 자리가 생겨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70대 전후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사지 멀쩡하게 생긴 X이 왜 노약자석에 앉으려고 해, 여기는 나이 든 사람만 앉는 자리야. 썩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모군은 “인대가 늘어가 깁스를 하고 있는 상태”라며 양해를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건 할아버지의 손찌검뿐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심지어 “너같은 X을 낳은 X은 좋겠구나, 기본도 안 된 것들”이라며 모군의 부모님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모군이 지난 20년 동안 배워왔던 노약자석의 의미가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모군은 “노약자석이 언제부터 노인 전용좌석이 된 건지 모르겠다”고 씁쓸해했다.

이처럼 지하철 노약자석을 둘러싼 갈등은 더 이상 가끔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아니다. 교통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도입된 좌석이 오히려 몸싸움과 거친 욕설이 오가는 갈등의 자리가 된 것이다.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자 일각에서는 노인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현실 등을 고려해 노약자석에서 노인석을 분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8일 서울메트로(1~4호선)·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 등의 통계에 따르면 ‘노약자석 자리다툼 관련 민원’은 2009년 252건에서 2011년 536건으로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다툼이 벌어지는 연령대는 20~30대 청년층과 65세 이상의 노년층이었다. 연장자 우선 배려를 주장하는 노년층과 나이는 젊어도 교통약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청년들의 갈등이 늘어난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교통당국은 노약자석에서 충돌이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다른 민원과 비교했을 때 노약자석 관련 문제가 절대적으로 많은 수치가 아니다”며 “온라인상에서 이슈가 된 적은 있지만 ‘지하철 막말녀’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분석은 다르다. 노약자석을 둘러싼 갈등은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로 불거진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호서대학교 노인복지학과 이선형 교수는 “(노인들의 일방적 점유도 문제지만) 젊은이들 가운데 노인들을 한가하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노약자석을 차지하는 집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교수는 “정작 서로의 (가치관과 입장 등)사정은 돌보지 않아 노약자석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더 커지는 양상”이라며 “단순히 넘어갈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현상으로 분석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인 인구의 급증이 지하철 노약자석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실제로 지난해 노인 인구 비율은 11%에 달했으며 2040년에는 국민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인권단체 간부는 “노약자석을 둘러 싼 갈등은 한국도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탄과 같다”며 “교통당국은 현행 노약자석을 노인석과 장애인, 임산부, 환자석 등으로 나누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점진적으로 확대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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