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日 학살은 일상” 정황증언
“조선사람들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했어”국가기록원이 13일 확보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 사할린 에스토루 지역에서의 한인 학살 정황증언을 보면 증언자들은 일본군의 조선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일상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증언은 이전의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사할린 한인 학살의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 정황을 담은 것이어서 일본군의 사할린 한인 학살뿐 아니라 강제동원의 실상에 대한 정부의 더욱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체계적 조사를 통한 증거 축적은 제대로 된 역사 기록과 피해보상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인의 ‘학살의 기억’ = 1945년 당시 11살이었던 사할린 1세대 황순영(78·여)씨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를 암흑기로 기억한다. 그의 기억 속에 당시 학살은 일상이었다.
황씨는 “전쟁에 진 일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만 보면 죽이려 했다”면서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도 전쟁이 끝나니까 일본사람들이 불러내 죽인 것”이라고 증언했다.
나무를 깎아 찔러 죽였기에 죽음에 이르는 시간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황씨는 설명했다.
그는 “부모님이 강제로 탄광일을 하셨는데, 탄광에서 죽은 사람도 있고, 사할린으로 끌려오다 죽은 사람도 있고, 갓 결혼한 신랑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일도 있고 생이별이 다반사였다”면서 “많이 천대받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1945년 당시 5살이었던 이태엽(72)씨는 나중에 들은 이웃집 부자의 사연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이씨는 “일본인들에게 몰려 피난을 가다가 장남의 다리가 잘렸는데, 그것을 그냥 두고 일본군을 위해 죽창을 만들러 갈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사연을 뒤늦게 듣고 안타까웠지만, 당시에는 워낙 헤어지고 죽고 피난가고 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신고자 2천200여명 재조사” =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신고자 1만여명 중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판정불능이나 보류 결정을 한 2천200여 명에 대해 재조사를 할 계획이다.
지난 8월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해 넘겨준 일본의 사할린 귀환 재일한국인회의 활동기록인 ‘이희팔 기증기록물 자료’와 한국의 중소이산가족회 활동기록인 ‘중소이산가족회 기증자료’ 덕택에 피해상황에 대한 증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는 각 개인의 사할린 이주동기와 방법, 시기 등이 대체로 조사돼 있다.
위원회 관계자는 “새로 확보된 자료를 통해 일반피해자로 분류됐던 사람이 위로금 지급 대상으로 바뀔 수 있고, 사망확인이 안 됐던 사람이 사망자로 확인될 수 있다”면서 “최대한 빨리 재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인 위원회의 활동시한을 내년 6월까지 6개월 늘리는 동의안을 국회에 내놓은 상태다. 동의안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와 본회의를 거쳐야 한다.
추가로 확보된 증거는 바로 피해조사에 구체적인 성과를 안기는 만큼, 증거 모으기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외대 방일권 교수는 “학살을 뒷받침할 의미있는 기록이 나오려면 러시아 KGB의 세부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 일본측의 기록이 나와야 하는데 이는 접근이 어려운 것은 물론, 아예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며 “차라리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들의 증언을 체계적으로 모아놓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방 교수는 또 “소수의 인물들에 대해서만 구술기록이 있을 뿐 현재로서는 증언도 기록도 모두 부족하다”면서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지역별ㆍ대상별로 체계적인 구술기록을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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