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요건 강화해야” vs “재벌 전횡 막는 역할 유효”
최근 배임죄로 기소된 주요 인사들이 법원에서 잇따라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배임죄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재계에서는 배임죄 처벌 요건을 강화해 오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재벌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로써 여전히 실효성이 크다며 현행법 존치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크다.
서울고법은 이달 14일 강덕수 전 STX 회장의 항소심에서 연대보증·담보 제공 등을 통한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배임) 일부를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유지했다.
기업집단의 총수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 계열사를 살리고자 한 경영적 결단이 결국 기업 손실로 귀결됐다고 해도 그렇게 판단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이를 범죄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달 5일에는 서울중앙지법이 통영함 납품 비리에 연루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허위공문서 작성·행사 등으로 구속기소된 황기철(58) 전 해군참모총장의 모든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다.
검찰은 2억원짜리 구식 음파탐지기를 41억원에 구입해 38억원의 국고를 낭비했다며 배임 혐의를 적용했지만 재판부는 죄가 안 된다고 봤다.
지난달 24일에는 잘못된 투자로 회사에 100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석채 전 KT 회장이 1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이 전 회장의 투자로 결국 손해가 나긴 했지만 ‘배임의 고의성’이 없었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배임죄 적용 오류로 재심리를 받게 된 사례다.
대법원은 이 회장의 혐의 가운데 일본 부동산 매입에 따른 배임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다며 특경가법상 배임이 아닌 형법상 배임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붙여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처럼 법원이 배임 혐의에 엄격한 판단 잣대를 들이대며 잇따라 무죄를 선고하자 재계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참에 배임죄 처벌 조건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현행 형법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를 모두 배임죄로 규정한다.
하지만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와 재산상 이익·손해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 법 적용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재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재계 한 관계자는 “배임죄로 기업인을 처벌하는 나라는 독일·일본·한국 등 세 나라밖에 없다. 그나마 독일·일본은 배임의 고의성 여부를 엄격히 판단하지만 우리는 법 조항 자체가 추상적이다 보니 ‘걸면 걸리는 법’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4년간 특경가법상 배임과 형법상 배임죄의 무죄율은 각각 평균 11.6%와 5.1%로 전체 형사범죄의 무죄율(1.2%)보다 훨씬 높다.
정치권에서도 이런 점을 고려해 형법상 배임죄의 처벌 규정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올해 8월 ‘손해를 끼칠 명백한 고의성이 있을 때’만 배임죄를 적용하도록 한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행 배임 규정이 재벌의 독단적 경영 행태를 막는 장치로써 여전히 훌륭한 역할을 한다며 적용 범위의 축소·조정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우리나라처럼 소수 지분을 가진 재벌 총수가 회사를 사유화해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배임죄 규정은 이들의 전횡을 막는 최후의 보루로써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법무부도 현행 배임 규정의 존치를 지지하고 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배임죄 규정에 대해 “회사 경영자의 부정을 방지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며 형법 개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배임 규정은 대주주의 부정한 경영권 행사, 상속·증여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 등 다양한 일탈 행위들을 바로잡는 순기능이 있다”며 “이런 견해는 형법학계에서도 큰 반론 없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올 3월 업무상 배임과 특경가법상 배임의 가중처벌 규정에 대해 “법률의 의미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