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北남침승인케한 美극비문서…스파이 활약

스탈린 北남침승인케한 美극비문서…스파이 활약

입력 2011-05-18 00:00
업데이트 2011-05-18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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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의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 마오쩌둥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1949년부터 거듭된 김일성의 계속된 남침 승인 요구에 대해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때문에 거부해오다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이를 번복하고 남침계획을 승인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7일 시판된 저서 ‘중국에 관하여’(On China)에서 스탈린이 당시 남침 계획에 ‘OK’ 사인을 주면서 “미국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스탈린이 태도를 돌변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스파이망을 통해 입수된 미국의 대(對) 아시아정책을 담은 극비문서가 중요한 배경이 됐다고 여러 외교문서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진단했다.

이 문서는 ‘NSC-48/2’라고 명명된 문서이다.

NSC는 미국의 국가안보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약자로 NSC-48/2는 NSC 참모들이 입안해서 1949년 12월30일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보정책 보고서이다.

이 문서는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 외곽에 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키신저에 따르면 이 문서는 소련을 위해 일한 최고의 이중 스파이였던 영국 정보부 출신 도널드 매클린을 통해 소련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매클린은 영국 명문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침투해있던 스파이였다. 2차 세계대전후 워싱턴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정보와 유럽원조계획인 마셜플랜을 먼저 빼내 소련에 제공하는 등 스파이로 맹활약하다 1951년 5월 소련으로 도주한 인물이다.

당시 미국의 극동방어선 대상을 일본에서 필리핀까지로 하고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12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밝혀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앞서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사사령관이 1949년 3월 도쿄 회견에서 유사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키신저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힌게 이 NSC-48/2 극비문서의 입수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이 문서가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분석가들에게 특히 신뢰감을 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한편, 키신저는 NSC-48/2 보고서의 목적과 당시 애치슨 장관의 연설은 중.소 갈등을 야기시키고 양측을 이간질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문서는 “대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공공연한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규정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5일 “미국은 대만의 중국군에 군사적 원조나 자문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장기적으로 중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존재는 소련이라고 규정했고, 소련과 분리된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 티토와 같은 노선을 밟아야 한다는 점을 공공연히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애치슨은 특히 “동서간 과거 관계는 끝났다. 이제 그 관계는 상호 존중과 호혜의 관계로 가야 한다”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중관계 정립에 대한 비전을 제안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

키신저는 “공산주의 중국을 향한 이 같은 비전은 닉슨 대통령이 정책으로 진전시킬 때까지 그후 20년동안 미 행정부에 의해 더 진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70년 미.중 국교정상화 구상의 씨앗이 애치슨 연설과 NSC-48/2 문서에서 뿌리가 내려졌다는 키신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키신저는 “애치슨 연설은 대부분 스탈린의 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구성됐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애치슨 연설에 대해 “중상모략”이라고 강력히 비난하는 입장을 발표할 것을 종용했지만, 마오쩌둥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고 며칠후 스탈린의 요구보다는 훨씬 낮은 톤으로 애치슨의 제안을 거절하되, 중국의 선택지를 열어두는 입장을 취했다고 키신저는 전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56년 12월 소련과 거리를 두는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했다고 키신저는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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