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가 대표작이냐고? 74살 난 아직도 글 쓰고 있는데

‘객주’가 대표작이냐고? 74살 난 아직도 글 쓰고 있는데

입력 2013-03-13 00:00
수정 2013-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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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객주’ 배경 울진·청송·봉화 찾은 김주영 작가 동행 취재

“내가요, ‘객주’를 서울신문에 연재하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몰라요. 너무 어려워서. 우리 아파트가 복도식이었는데, 오밤중에 복도에 서서 울곤 했어요. 왜 그리 눈물이 쏟아지던지. 내가 왜 이 어려운 일을 시작했나 후회도 됐고요. 역사 지식에 대한 근력이 달리더군요. 여기서 더 쓴다는 것은 독자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라 판단하고, 그래서 그만뒀어요.”

경북 청송군 주왕산 길을 걷고 있는 ‘길 위의 작가’ 김주영.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데도 답사를 서너 차례 다니는 그는 객주 완결편을 쓰면서 울진~봉화~청송을 한 달에도 서너 번씩 내려가 걷고 또 걷는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경북 청송군 주왕산 길을 걷고 있는 ‘길 위의 작가’ 김주영.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데도 답사를 서너 차례 다니는 그는 객주 완결편을 쓰면서 울진~봉화~청송을 한 달에도 서너 번씩 내려가 걷고 또 걷는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소설가 김주영(74)은 서울신문 1979년 6월 1일자로 시작한 ‘객주’ 연재를 4년 9개월 만인 1984년 2월 29일자 1465회로 막을 내렸다. 당대 최고 원고료의 두 배를 받던 작가는 원고료를 더 올려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이 살아 있는 김주영은 이 얘기를 하면서 마른세수를 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30년 전 괴로움과 어려움이 생생히 살아났나 보다.

그는 지역의 잎담배 생산조합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32살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전업 작가로 돌아선 것은 ‘객주’ 연재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 것이 계기가 됐으니, ‘객주’는 김주영을 제대로 된 소설가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었다. 장돌뱅이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의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모두 돌아다녔다. 연재하는 약 5년 동안에는 집에 한 달에 열흘도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 장돌뱅이가 돼 살았다.

여기서 잠깐, 객주(客主)란 무엇일까. 객주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업, 특산물을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유통하는 유통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보관업 및 물류업을 하던 장소이자 그런 행위를 하는 상인을 말한다. 시작은 신라시대부터인데, 고려말 공양왕이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는 도가, 접소, 도방이라고도 불렀고, 객주의 성격에 따라 물산객주, 해물객주, 젓갈객주 등으로 불렀다. 상도덕을 강하게 규율했는데 매점매석을 하거나, 강매를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하는 여인네를 범하면 곤장을 치곤 했다. 보부상은 보자기 보(褓)자와 짊어진다는 부(負)자가 합쳐진 것으로, 신체가 건장하고, 지름길을 많이 알며, 기억력이 좋고 셈이 밝은 사람들이 종사했다. 정보 수집에도 능해 어떤 물건이 달리고 넘쳐나는지 파악해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에 물가를 조절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같은 역할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강력한 조직력을 정치권력이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만들어 보부상 조직을 장악하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정부 편에서 토벌에 가담했다. 1898년 독립협회를 와해시킨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김주영의 ‘객주’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혼란한 개화기 상황에서 보부상의 생활풍속과 이들의 경제활동, 정치적 이해관계를 주인공 천봉삼을 중심으로 그려 내고 있다.

1979년 6월 1일자 ‘객주’ 서울신문 연재에 앞서 그해 5월 28일자에 소설가 윤흥길(왼쪽)이 김주영을 인터뷰하고 있다(위). 1984년 2월 28일자 서울신문에 김주영 작가가 ‘객주’를 4년 9개월 1465회로 막을 내리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1979년 6월 1일자 ‘객주’ 서울신문 연재에 앞서 그해 5월 28일자에 소설가 윤흥길(왼쪽)이 김주영을 인터뷰하고 있다(위). 1984년 2월 28일자 서울신문에 김주영 작가가 ‘객주’를 4년 9개월 1465회로 막을 내리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원래 구상 대로라면 천봉삼을 죽였어야 했는데, 마지막 회에 산 채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중에라도 옳게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 천봉삼을 죽였으면 내가 더 못 썼을 텐데, 30년 만에 다시 연재를 하게 돼서 그것도 서울신문에 하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이렇게 말을 마쳐 놓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김주영은 껄껄거렸다. ‘객주 10권’을 서울신문에 4월 1일자부터 연재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월 말 경북 울진~청송~봉화를 2박3일간 동행 취재하는 자리에서였다. ‘객주 완결판’은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와 교보문고 웹진에도 동시에 연재된다. 그는 그 지역을 한 달에도 서너 번 왕래하고 있었다. 고향 청송에서 ‘객주문학관’을 짓고, ‘객주 문학마을’을 조성하며, 보부상길을 개발하고, 진보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수년째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객주 10권의 주인공은 여전히 천봉삼이다. 조선 말기에 천민, 말단이라는 상업에 종사하는 천봉삼은 정의감도 강하고 의협심이 있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정 많고 의리 있는 김주영의 분신 같은 남자다.

당시 보부상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김주영은 연재를 마감하기 전날인 1984년 2월 28일 기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연령대라 할 수있는 40대 초반의 근 5년간을 이 소설에 매달릴 수 있었으면서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저잣거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작가적 호기심과 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충동했기 때문…(중략)… 내가 살았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이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런 장돌림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 드팀전, 어물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땀 냄새가 뚝뚝 배어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보아 왔었다. 때로는 엄지머리 한 노인네가 숫돌지게를 우리 집 앞마당에 내려놓고 들메끈을 고치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 북새판을 이루던 장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저잣거리엔 허접쓰레기만 굴러가고….”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나 진보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장날이면 자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장날에 낯선 사람들이 와서 듣도 보도 못 하던 물건들을 파니 신기했던 것이다. 학교와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교과서 한 권 없이 학교에 다녔고, 공책은 어머니가 창호지를 잘라 바느질해 만들어 준 한 권뿐이었던 가난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장터의 모습은 소설가가 된 뒤에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400장짜리 중편소설을 써 보자 생각을 했지요. 이전에 장터 옆에 사는 작부 이야기를 쓴 ‘외촌장 기행’이라는 단편소설도 썼지요. 내가 이것을 좀 길게 중편을 쓰고 싶었는데, 잡히는 것이 없더군요. 아쉬워하던 차에 장돌뱅이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보부상이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고종 때 보부청(1866년)이 생겼고, 대한제국 때는 상무사(1899년)가 됐습니다. 술 먹던 자리에서 농담 삼아 김주연(전 한국문학번역원장) 당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득달같이 연재를 하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10권은 상무사로 넘어간 뒤의 이야기입니다.”

원고를 한 장도 안 쓴 상태에서 1979년 초여름 ‘객주’ 연재가 시작됐다. 그는 판소리 사설이나 지방에서 나온 향토지, 세시풍속도, 고서적 등을 참고해 필요한 자료를 추려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대학교 사학과 석박사 논문을 100편 이상 읽었다. 요즘처럼 분야별로 세분화된 책이 수십, 수백 권씩 출간되는 때가 아니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조를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 서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고통은 남북 분단으로 북한의 장돌뱅이를 표현할 수 없게 되면서 절정을 이뤘다. 조선의 장돌뱅이가 개성이나 원산, 의주를 오갔을 텐데 모르는 척 빼놓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길 위의 작가’, ‘발로 쓰는 작가’가 아닌가.

“나는 단편소설을 써도 그 지역을 두서너 번씩 답사합니다. 그래서 ‘발로 쓰는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역사 지식도 부족하고, 지리적인 관심도 없다 보니 대신 작품 분위기와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꼭 현장 답사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현장 답사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움에 휴전선 남쪽 지방을 다 훑고 다녔지요.”

북한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했을까.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1980년대 초인데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83)씨였어요. 청와대로 잠깐 들어오라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이상하고 기분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 사석에서 전두환 욕을 더러 했지만 말이에요. 허문도씨 방에 가보니 책상에 객주 4~5권이 있더라고요. ‘작가가 긴 장편을 쓰려면 고생하는 것 아니냐’라고 격려를 해요. 그날 오후에 MBC 사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전달해 줄 것이 있으니 정동 MBC에 나오라고요. 사장이 직접 짐을 메고 나왔는데 지도였어요. 일본에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한반도의 상세한 지도였어요.

조선후기 장돌뱅이 애환 오롯이… 40대가 꼭 읽어줬으면

마을의 논·밭은 물론 우물과 냇가의 다리까지 다 그려져 있는 지도예요. 허문도씨가 주일한국대사관에 지시해서 상세한 전국 지도, 남북이 다 있는 전국 지도를 물색해 보내라고 해서 그걸 나한테 전달한 거예요. 그 지도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권뿐입니다.”

원산, 평양, 의주, 개성 등은 못 가보고 써야 하는 마당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 지도 덕분에 객주를 9권까지 쓸 수 있었단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2005년 김주영은 ‘객주’에 서술된 개성 등을 방문했는데 조금도 고쳐 쓸 곳이 없어서 안도했다고 했다. 물론 헌책방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의 글들을 수집해 참고한 그의 남다른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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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주영이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보부상 위령비 표지석의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15세기 보부상들이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물물교환한 흔적이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소설가 김주영이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보부상 위령비 표지석의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15세기 보부상들이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물물교환한 흔적이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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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팔라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하는 십이령고개를 걸어 내려오는 소설가 김주영(오른쪽)과 이규봉씨. 십이령고개는 울진과 봉화를 이어주는 길로 해산물과 농산물을 교류하는 통로였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너무 가팔라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하는 십이령고개를 걸어 내려오는 소설가 김주영(오른쪽)과 이규봉씨. 십이령고개는 울진과 봉화를 이어주는 길로 해산물과 농산물을 교류하는 통로였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객주를 연재하는 과정은 더 어려웠다. 그는 서울에서 글을 쓰지 않고 대학 노트를 싸 들고 전국을 유랑하며 면 소재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글을 썼다.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먼지가 뿌옇게 피어 오르는 비포장도로를 달려가 숙박할 곳을 겨우 찾던 시절이었다. 답사를 마친 지역에 관한 1주일치 원고를 써서 서울신문 지국에 놓고 다음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신문사 지국은 그 원고를 서울의 편집국 문화부로 보냈다. 그는 “당시 서울신문의 지국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문제는 산골짜기와 해안선으로 떠도는 그가 툭하면 간첩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그의 가방을 뒤지면 카메라, 지도, 메모지가 나오는데 메모지에 어느 지역의 산에 어떤 나무가 얼마나 심어져 있다는 둥 지형지물에 대한 설명이 많으니 오인받을 만했다. 주민등록증을 내놔도 위조한 것이라며 믿지 않았단다.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가는 시간에 쫓기는 사람인데, 아무리 해명을 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꼼짝없었다. 파출소마다 차량도 없을 때라 걸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경찰서까지 가야 했고 시간이 한없이 낭비됐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역사소설에서 사실과 상상력을 정밀하게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어떤 소설은 사실을 기반으로 답사를 철저히 해서 이게 소설인지, 논문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있어요. 또 너무 상상력이 승하면 황당해요. 소설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화되면 감동을 유발하죠. 소설 최우선의 목표는 감동을 주는 것,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했다.

그 절묘한 조화를 찾아야 하는 숙명을 견디며 객주를 쓰는 동안 그는 몸을 다 버렸다. 평소 한 갑 피우던 담배가 연재 중에 두 갑 반으로 늘었다. 담배 연기에 검은 앞머리가 노랗게 변할 정도였다. 김주영은 “소설 쓰는 일이 아니면 담배를 그리 많이 피울 리 없었지요. 글 쓰는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술을 미친 놈처럼, 환장한 놈처럼 마실 일도 없었을 것이고…”라고 한탄했다. 그는 담배를 끊은 지 7년이 됐다. 건강진단에서 폐암 전 단계인 폐기종을 진단받았기 때문이다. 소설 쓰면서 습관화된 담배를 끊는 데 3년이나 애를 먹었고, 그 3년간 소설을 못 썼다.

객주를 쓰면서 하나의 어휘를 찾으려고 두툼한 이희승 국어사전을 밤새 뒤져 찾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아예 개인용 ‘객주 사전’을 만들었다. 화석화되는 우리말에 대한 우려를 담아 서민들의 언어를 재현해 놓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객주의 언어에 자극을 받았는지 연재를 끝내고 한참 뒤에 ‘우리말 갈래사전’(1990년)이 나왔다고 했다.

김주영은 원고를 뽑아내는 방식도 특이하다. 우선 초고를 대학노트에 쓰고, 200자 원고지에 옮겨 적었다. 대학노트 한 줄에 작은 글씨로 두 줄씩 초고를 썼다. 180㎝의 커다란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어 자세히 보니 손이 체구에 비해 섬세하고 작았다. 꽉 채운 뒤 원고지로 옮기면 원고지 30장이 나온다. 또 원고지에 옮겨 적을 때는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안 쓰고 펜촉이 달린 철필로 썼다. 다 써 놓은 원고지에 잉크가 뚝 떨어지면 버리고 다시 쓰곤 했다. 초고를 원고지에 옮겨 쓰면서 문체를 다듬었다. 펜촉(철필)에 잉크를 찍어서 원고지로 돌아오는 길에 표현이 바뀌었다. 여관과 여인숙에 들어가 원고를 쓸 때는 낮도 밤도 없었다. 써야 할 양을 다 쓰지 못한 밤엔 잠을 못 잤다. 머릿속에서 단어와 이야기들이 뱅뱅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철필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세계 여행을 할 때 골동품상에 가 철필을 수집해 50개를 모아 놓았다. 요즘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는데 문장이 늘어지곤 해서 압축하는 작업에 공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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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수산리 바닷가에 재현된 염전을 돌아보는 김주영. 과거 이 지역은 모두 염전이었으나 해방된 뒤 모래사장으로 바뀌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경북 울진군 수산리 바닷가에 재현된 염전을 돌아보는 김주영. 과거 이 지역은 모두 염전이었으나 해방된 뒤 모래사장으로 바뀌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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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군 진보장에 들러 상품들을 둘러보는 김주영.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경북 청송군 진보장에 들러 상품들을 둘러보는 김주영.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당시 10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 객주에 사람들은 왜 열광했을까. 김주영은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당시 장사꾼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없었다. 장사꾼들은 상놈이자 천민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에 대한 철저한 탐구 끝에 장돌뱅이에 아주 근접해서 그때 쓰던 언어, 풍속 등이 객주 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졌고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 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어느 지방의 특산물은 뭐라는 식의 박물지 같은 요소가 있었다.

또한 객주에는 색사(色事)가 많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색사에 관심이 많아요. 신문 소설이라서 부러 많이 넣은 것이 아니라 장돌뱅이들의 삶이 그랬죠. 장돌뱅이들 중에는 총각이 많았는데 엄지머리라고 해서 머리를 땋고 다녔어요. 당시 조선의 풍속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장가를 들지 않으면 상투를 틀 수가 없었어요. 장가를 못 든 이유는 보부상들의 장사가 이문이 박해서 자기 혼자 먹고살기에는 어려웠던 거죠. 숫돌 같은 것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다고 해도 돈이 얼마나 남겠어요. 마누라를 얻고 애도 낳아야 하는데 가족을 부양할 만큼 벌지 못했죠. 또 너무 객지로 돌다 보니 가족을 유지할 분위기가 안 돼서 마누라가 잘 달아났어요. 객주 1권 첫머리에 도망간 마누라를 찾아가서 징치하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번 객주 완결편이 되는 연재에도 심심찮게 색사가 등장할 것이니 기대해 보라고 했다. 보부상들은 당시 객지를 돌아다니면서 갈보, 들병이, 주모 등과 거래를 하게 되는데 그녀들이 몸을 파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먹고사는 방편이라고 말했다.

김주영은 ‘객주’를 40대가 읽어 줬으면 했다. 옛말에 대한 언어 감각이 아직 살아 있고 삶을 돌아볼 눈도 생겼기 때문이다. 또 조선 후기에 물자를 유통하는 유일한 기능을 가진 집단이었던 보부상을 통해 서민과 천민의 애환을 봐 달라는 것이다. 객주는 대우 김우중 전 회장과 LG 회장 등도 읽었다. 작고한 이수인(1941~2000) 전 국회의원이 경북대 교수 시절 “다른 신문 소설은 모두 화장실에서 읽지만 객주는 꼭 사무실 책상 앞에서 읽는다”고 한 말을 직접 들은 적도 있다.

소설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됐을까.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인이 되고자 했는데 소설을 쓰게 됐다. 사주팔자니 신점이니 하는 것을 재미 삼아 쳐 보면 사업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점괘가 나오지만 정작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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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작가
김주영 작가
“내가 좀 헤퍼요. 헤픈 사람은 돈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사업하면 망해요. 절약하고 검소해야 하는데 나는 안 그래요. 원고료도 많이 받았는데 집 살림에는 크게 보탬이 안 됐고 술을 마셨죠. 하하하.”

헤프다기보다 그는 돈을 쓸 때 쓰는 사람이다. 그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고초를 겪은 후배 문인들을 많이 지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그때 내 생각은 ‘느그들이 감옥 가고 고문당하고 구타당하고 하는 일을 나도 같이 해야 하는데, 내가 신문에 연재하느라고 느그가 대신해 준다. 느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도망가는 데 필요한 돈을 준다든지, 숨을 장소를 제공한다든지, 술값·밥값은 내가 내든지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요즘 후배 문인들에게 다른 충고를 하고 싶어 한다. “소설 쓰는 일에 몸을 바치세요. 소설 쓰는 일에 모든 역량과 기능과 에너지를 모아도 좋은 소설을 쓸 기회를 못 얻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소설가로 출발했으면 소설 쓰는 일에 전력투구하라는 거죠. 소설로 사회적 병리현상을 비판하고 정치소설로 사회를 꾸짖으라는 거예요. 현실 생활에서 지사로 행동하지 말고 소설로 행동하세요.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건장한 남자가 일생을 바쳐서 쓸 만한 것이 소설이다, 소설 작업이다’라고 했는데, 100% 동감합니다. 열정이나 근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전력투구하세요. 말하고 싶은 바를 소설에 담으세요.”

그는 등단해 놓고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려했다. 손으로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아도 머릿속으로는 늘 글을 쓰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다른 직업을 생각하지 못한 이유다. 그는 평생 소설가로 산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은 산기슭에 ‘김주영의 묘’란 묘비를 보고 등산하는 사람들이 ‘소설가 김주영의 무덤이 여기구나’ 하고 끄덕이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묘비명은 ‘‘객주’의 김주영’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현재도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내 대표작이 ‘객주’라고 아직 말할 수는 없습니다.”

칠순을 넘겼어도 창작 의욕을 불태우는 노소설가의 모습은 청년 그 자체였다.

청송·울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2013-03-1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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