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窓] 홈과 하우스/길은영 미술심리상담센터 소장

[생명의 窓] 홈과 하우스/길은영 미술심리상담센터 소장

입력 2014-03-22 00:00
업데이트 2014-03-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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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맞닥뜨린 당혹감과 난감함, 두려움은 지금도 오싹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섰을 때 사춘기 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다. 책장과 옷장은 텅 비었고, 거기서 끄집어낸 책과 옷가지들이 아이 방을 가득 채웠다. “엄마, 나 안아줘.” 와락 아이를 끌어안았지만 놀란 가슴이 말문을 막았다. ‘왕따? 폭력? 아니면 혹시?’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상상을 털어내며 힘겹게 물었다. “아무 일 없어. 그게 문제야. 꿈을 꿔야겠는데 꿈이 없어. 생각이 안 나. 난 이도 저도 아니야. 그게 견딜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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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영 미술심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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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위로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처방전이 없는 성장통을 앓는 아이에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위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듯싶다. 다만 그저 어깨를 빌려주었을 뿐이다. 어릴 적 아이는 한몸에 세상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씨앗을 담고 있으며, 예술가이고 과학자이며 운동선수이고 연구자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몸에 담고 있던 씨앗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내 아이가 지금 그 현실과 마주 서게 된 것일까.

그 두렵고 암담했을 순간을 다행히 함께해 줘, 아이는 스스로를 수습했다. 그 뒤로 아이는 자기 방의 왕이 됐다. ‘내가 할 테니 절대 쏟아낸 물건들을 정리하지 말 것’을 선언했다. 난 그 명에 따라 내 정리벽을 접어야 했다. 왕은 조금씩 제 방을 왕의 방으로 만들어 갔고, 난 조금씩 왕이 버린 것들을 처리하는 집사가 돼 갔다. 내 집이 하우스가 아니라 홈이 되는 과정을 그렇게 감당했다.

집을 나온 아이들이 거리에 넘친다. 하우스를 탈출해 자신(의 자유)을 ‘인정’해 주는 거리에 갇혀 산다. 아이들도 다들 자기 방의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성장통이 요구하는 양해각서를 내보이며 엄마 아빠에게 사인을 받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 사인을 받지 못하자, 그렇게 자신의 왕국을 찾아 전쟁터로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모여 지금 신림동에서, 봉천동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만들고, 흑역사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 전장에서 아이들은 한겨울 아스팔트만큼 차갑고 무심한 어른들에게 또다시 좌절할 것이다. 그렇게 재빨리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이를 부모는 무기력하게 바라보거나, 거리의 어른들은 자기가 겪은 성장통을 까맣게 잊은 채 남의 집 아이로 볼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 했다.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오늘도 꿈을 하나씩 시간에 실어 흘려보내며 그렇게 어른이 돼 가는 아이들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봤으면 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제 안의 온갖 씨앗들이 마구 솟아 나오고, 주체하고 정리하고 하나라도 움켜쥘 시간도 없이 흘려보내며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그저 어른들이 만든 몇 가지 잣대로 재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이들의 가출을 그저 부모·자식 간의 권력게임이라는 틀로 바라보고 쉽사리 가해자와 희생자로 나누는 일도 삼가자. 일어난 일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리의 전사들이 맞이한 시간을 함께하자. 아이가 나선 집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기지며 홈이 돼야 한다. 아직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용기가 없는 아이들이라면 우리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이 훗날에 만날 세상을 이어주는 오작교가 되자. 좌절과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우리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이 전사들의 따뜻한 모닥불이 되자. 언젠간 이 아이들도 ‘거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면 모두가 가짜’라고 했던 헨리 밀러처럼 당당하게 자신이 거리에서 경험한 ‘진짜’를 들려줄 어른이 될 것이다.
2014-03-2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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