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원 작가 등 ‘당신의 불확실한 그림자’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내년 2월 24일까지
조각 전공이라 대학 생활 내내 ‘덩어리’들을 만지며 지냈다. 그러다 그 덩어리들에서 어떤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했다. 그래서 독일 유학길에 올라 커피 가루, 찻잎 같은 재료를 선택했다.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해외물을 먹다 보니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구성한다 싶어서다. 다른 하나는 너무나 가벼운, 입으로 ‘후’ 하고 한번 불면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벼움이 좋아서였다.이창원, parallel world
홍범, hide & seek #5
황지은, shadow you
●전시장 들어서면 그림자들이 벽면에 가득
이 재료를 써서 만든 것은 다시 거꾸로 묵직한 덩어리감이 느껴지는 조각상이었다. 빼곡하게 늘어선 서랍에다 찻잎, 커피 가루를 이리저리 쌓아서 전체적으로 조각상의 실루엣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감을 느끼게끔 군림하는 조각상인 데다 정치적 격변에 따라서는 금세 내쳐지고 밧줄에 질질 끌려다닐는지도 모를 조각상의 운명을 넣은 것이다. 아니 근엄할 때보다 차라리 그렇게 내버려졌을 때 마침내 자유로워질는지 모른다.
그다음 선택이 그림자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창원(40) 작가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내년 2월 24일까지 열리는 ‘당신의 불확실한 그림자’ 전에서 ‘패럴렐 월드’(Parallel World)를 선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림자들이 벽면에, 천장에 가득하다. 손, 발, 나무, 동물 같은 문양들이다. 이 그림자들을 추적해 보면 그 아래 배치된 잡지들이 나온다. 대개 세계적 이슈를 다루는 시사잡지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오려내 거기에다 거울을 달고 그 거울에다 전등 빛을 쏘인다. 그러면 반사된 그림자가 여기저기 맺히게 된다. 화이트큐브라는 미술품 전시의 조건과 상당히 잘 어울려 보인다.
●이슈 속 대상물 해방시키려 시사잡지 선택
처음 출발이 엄격한 덩어리감에서 풀려난 자유였듯 시사잡지를 선택한 것도 처음에는 그 이슈에 얽매인 대상물들을 해방해주기 위함이었다. 골치 아픈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 자유롭게 떠돌도록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그렇게 비춘 그림자로 뭔가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미술사에서 따온 명화들을 재구성하거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이 눈에 띄어 올해 일본 모리미술관이 3~4명의 유망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맘(MAM) 프로젝트에 선정돼 일본 전시를 막 끝낸 참이다.
●원하는 효과 내기 위해서 조명에 심혈
이번 전시작은 그 가운데 동굴 벽화 느낌의 작품을 가져온 것이다. 일종의 풍자가 아닐까. 지구 상의 각종 사건 사고 같은 골칫덩이들을 이용해 동굴 벽화 같은 느낌으로 꾸몄을 뿐 아니라 거기다 평행세계라는 이름까지 붙여둬서다. 고대와 현대를 묘하게 엇갈리게 겹쳐둔 그 태도 때문이다. 작가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았다. 풍자라기보다 “주의 환기”라 했다. “고대의 동굴 벽화를 보면서 우리가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 보듯이 이 전시장 공간을 보고서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떤지 상상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게 멀리 떨어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조명 문제. 잡지를 찢어 거울을 달아 놓은 작업이라 갈수록 스펙터클한 작업을 선보이는 현대 작가치곤 제작비가 싸게 먹히겠다고 농담을 했더니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조명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조명 가격이 의외로 비싸더라.”며 웃었다.
이번 전시에는 공사장 현장 식당을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해 둔 성기완·이수경의 작품, 요즘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웅성대는 그림자로 치환해둔 황지은의 작품, PVC파이프로 샹들리에를 만들어낸 홍범의 작품 등이 함께 전시됐다. (02)720-511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2-12-15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