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검우강호

[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검우강호

입력 2010-12-05 00:00
업데이트 2010-12-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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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우가 아닌, 오우삼의 영화 깊은 곳에는 확실히 동양정신의 정수가 깔려 있다. 미국식 할리우드표 버터가 녹아 있는 존 우의 영화에서는 절대 만나볼 수 없는 인생의 철학이 담겨 있다. <검우강호>는 <첩형쌍웅>이나 <영웅본색>의 총 대신 수많은 검들이 등장한다. 총이 아닌 칼, 그리고 존 우가 아닌 오우삼. 왜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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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수많은 강호의 은둔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검우강호>에서 무림고수들이 서로 부딪치는 이유는 8백 년 전 사라진 달마대사의 시신 때문이다. 그 시신은 죽은 피부를 다시 생기가 돌게 하고 최고의 무공을 연마할 수 있게 하는 신비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초능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나 유전자 변이의 괴물 헐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신이다.

황실의 명으로 달마대사의 유해 반쪽을 은밀히 보관하고 있던 지앙(정우성)의 아버지는 유해를 노리는 암살단 흑석파 일당에게 살해당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지앙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 채 평범한 촌부의 모습으로 시장통에서 살아간다. 시장통에서 비단장사를 하고 있는 정징(양자경)을 보고 지앙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정징은 계속되는 만남 끝에 갈등하다가 지앙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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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앙과 정징 커플의 만남과 결혼까지의 과정은 <검우강호>에서 가장 서정적인 부분이다. 그들을 맺어주는 것은 비다. 비가 오면 어디선가 지앙이 쏜살같이 달려와 길거리에 펴 놓은 지앙 가게의 비단을 거두어들인다. 처음에는 지앙을 의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던 정징은 지앙의 순수한 모습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그들이 비를 피해 찻집 처마 밑에 서 있는 날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혼례까지 맺는 것으로 발전한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어디서 만나든 경계 없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 그것이 물의 상상력이다.

전력이 불확실한 정징의 정체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감독은 슬쩍 드러내 보여준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며 빠른 속도로 칼질을 하다가 파리가 귀찮게 날아다니면 칼을 던져 정확히 파리를 반으로 갈라놓는 장면은 재미있다. 정징이나 지앙이나 모두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갖고 있는 강호의 은둔고수들인데 그들이 서로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다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서 각자 서로 모르게 무림 고수로 활동하는 이야기인 <검우강호>를 서구인들이 <미스터&미세즈 스미스>의 동양판이라고 보는 이유는 충분하다.

다만 정우성 양자경의 조합은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드러나는 외모 때문에 조금은 아쉽다. 이야기의 설정상 연하가 무리는 없고 또 연하가 대세인 요즘 코드에도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천하의 정우성과 양자경이 부부의 연을 맺는 장면은 두 배우를 아는 우리들의 눈에는 조금 어색하게 비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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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말레이시아 출신인 양자경은 1962년생이다. <예스마담>(1985) 시리즈가 국제적으로 흥행 성공하고 <007 네버다이>(1997)에도 캐스팅되면서 아사이권 배우로서는 일찍이 글로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할리우드의 러브콜은 <게이샤의 추억>(2005) <미이라3>(2008)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에서의 이지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그윽한 눈빛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검우강호>에서의 정징이 반가울 것이다. 역시 배우는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오우삼은 이안과는 또 다르게 양자경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와호장룡>의 유수련과 <검우강호>의 정징은 비슷하게 공유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다르다.

<검우강호>의 이야기는 흑석파 일당이 정징을 찾아내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때 흑석파의 가장 뛰어난 검객이었던 정징은 달마 유해 절반을 가지고 모습을 감추었고 흑석파 일당은 사력을 다해 정징을 찾다가 얼굴을 바꾸고 평범한 촌부의 아낙네로 살아가는 정징을 발견하게 된다. 지앙과 정징 모두 신분을 숨긴 채 은둔해서 살아가기 위해 얼굴을 바꾸었다는 설정은 저절로 존 우 감독의 <페이스 오프>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우삼 감독이 헐리우드로 건너가면서 존 우라는 이름으로 만든 영화 중에서 <하드 타켓> <브로큰 애로우>의 적응기를 거쳐 비로소 자신의 칼라를 찾은 작품이 <페이스 오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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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으로 얼굴을 바꾸는 설정은 현대의학으로는 최근에야 가능해졌지만 동양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주 등장한다. 중국의 전통 기예인 변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얼굴을 변모하게 만드는 신비한 기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설정이 동양권에서 큰 무리 없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의학의 발전과 도움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적 서구의 합리주의 대신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동양적 사고의 차이 때문이다.

흑석파는 항상 망토와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정확하게 신분을 알 수 없는 우두머리 왕륜(왕학기)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고수들인 옥과 레이빈, 마법사 등을 거느리며 신출귀몰하게 활동한다. 결혼식 첫날밤 남편과 시부모를 살해한 전력의 잔인한 옥(서희원)은 감옥에 갇혀 사형당하기 직전 흑석파의 왕륜에게 구출되어 암살단 비밀병기로 성장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미인계를 쓰기도 하는 교활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춘 캐릭터다. 독침을 자유자재로 쓰는 레이빈(여문락)은 자신의 아이와 아내 등 가족들에는 한없이 선량하고 중국에서 가장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지만 적과 대결할 때는 무섭게 돌변한다. 마법사(대립인)는 평소 망토 밑에 다양한 것들을 숨기고 다니다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마법을 즐기는 흑석파 책략가이다.

<검우강호>는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는 무림고수가 신분과 얼굴을 바꾸고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만나 결혼하고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진정한 신분은 모른다는 재미있는 설정과,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달마대사의 반으로 나누어진 유해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된 흑석파 일당, 거기에 복수의 테마가 뒤섞인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총 대신 검으로 화려하게 무장한 오우삼표 액션이 황홀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상투적이며 작위적인 설정이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는 못한다, 다만 흑석파 두목 왕륜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가 주목을 끌기는 하지만 인간의 욕망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이안의 <와호장룡>이 여성적인 섬세함과 날카로운 칼날의 부딪침 속에서도 부드러움을 갖추고 있다면, 오우삼표 <검우강호>는 남성적 드라마틱함과 커다란 스케일, 선 굵은 이야기들이 시선을 끈다. 두 영화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대만 출신인 이안과 홍콩 출신인 오우삼 모두 헐리우드로 건너가 국제적 감독이 되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동양정신의 깊은 본질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글_ 하재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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