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5년 조사도 끝내 못 밝힌 우키시마호 비극

정부 5년 조사도 끝내 못 밝힌 우키시마호 비극

입력 2010-12-26 00:00
업데이트 2010-12-2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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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첫 귀국선에 오른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바닷속에 수장된 우키시마(浮島)호 비극의 비밀은 5년간 이뤄진 정부 차원의 광범위한 조사에도 끝내 풀리지 않았다.

 ‘우키시마호 폭침’은 1945년 8월24일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던 한인들이 의문의 폭발사고로 마이즈루만에 수장된 비극적 사건이다.

 8월22일 조선인을 태우고 아오모리현을 떠난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24일 마이즈루항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해 침몰했다.

 일본 정부는 원인 모를 사고로 한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정확한 승선·사망자 수,사고 원인,사후처리 등을 놓고 의문이 끊이지 않아 정부가 2005년부터 대대적인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승선·사망자 규모=일본은 한인 승선 인원이 3천735명(일본 해군 255명),한인 사망자는 524명(일본 해군 25명)이라고 공표했다.그러나 생존자들은 승선자는 7천500~8천명,사망자는 3천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승선자를 3천735명이라고 발표한 것은 ‘편승자 명부’에 기초한 것이지만 아직 이 명부는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일본이 사고 직후 조사해 만든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단’,‘유체수용명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1950년 일본 정부가 회신한 문서에서 확인됐지만,이들 명부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인 사망자가 524명이라고 발표한 것은 ‘사몰자 명부’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이 명부는 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9~10월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돼 신뢰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 시기에는 사망자 신분 확인이 불충분했고 선체 인양 전이어서 사몰자가 상당수 빠졌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 폭발 원인=일본의 고의적인 폭침이라는 주장과 미군 기뢰에 의한 폭파설이 대립하고 있다.그러나 결정적인 근거가 없어 한국 정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물기둥이 솟았는지,폭발음이 몇 차례였는지,폭발 이후 배가 어떤 형태로 꺾여 침몰했는지 등 중요 사실을 놓고도 생존자의 진술이 엇갈린다.

 정부는 최근 펴낸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우키시마호의 목적지가 출항 전부터 부산항이 아닌 마이즈루항이었을 수 있다는 ‘항로 변경’ 의혹을 제기했다.

 출항 하루 전인 21일 연합국 요구로 ‘항해금지령’이 내려졌고,22일에는 긴급 전보로 “24일 오후부터 100t 이상 선박의 항행을 금지하며 목적항에 도착할 수 없으면 가까운 군항·항만에 입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이유에서다.

 애초 함장 등이 이 배가 부산항으로 갈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사고가 ‘촉뢰’에 의한 것일지라도 출항을 미루거나 오미나토로 복귀함으로써 사고를 피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게 위원회의 판단이다.

 ◇ 그 밖의 쟁점들=일본이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유족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분골·합장했으며,유골을 안치·이동할 때 유족에게 알리지 않은 점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은 1950년 3월 선체를 인양하면서 103구의 유골을 수습했는데,이를 사고 당시 임시로 묻은 153구의 유골과 함께 화장하고서 256위를 사망자 수에 맞게 524위로 분골·합장한 것이다.

 1971년 도쿄 유텐사로 이장해 안치된 유골 524위 중 241주는 1971~1976년 3차례에 걸쳐 국내에 봉환됐으며 현재 280주가 유텐사에 남아 있다.

 사고 후 5년이 지난 시점에 선체를 인양해 수년간 유체를 내버려뒀으며,우키시마호 선체 안에 수백여구의 시체가 있는 점을 알면서도 수중에서 선체를 분해한 점도 논란거리다.

 구호 과정도 엉터리였다.생존자들은 해군에서 옷을 한 벌 지급받았을 뿐 식량지원조차 되지 않았다고 증언했지만,일본은 “침구·의복·식량 등을 지급했고 부상자 진료,입원에 최선을 다했다”고 반박한다.

 일본이 사고 이후 유족부조료 등을 지급하려고 ‘재일조선인연맹’과 교섭하려 했음에도 진상 규명부터 촉구하는 연맹과 교섭이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연맹이 해산하자 국가 등 공식경로로 교섭 노력을 하지 않았던 점도 문제점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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