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옹진반도/노주석 논설위원

[씨줄날줄] 옹진반도/노주석 논설위원

입력 2010-11-27 00:00
업데이트 2010-11-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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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20일 옛 소련의 국방장관이 스탈린에게 보낸 극비문서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모두 37건의 38선 침범사례가 발생했으며 발포는 모두 남쪽이 시작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이 밖에도 평양에서 모스크바에 보낸 비밀문서 등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설에 근거, 옹진반도 국사봉과 두락산, 까치산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남북 군사충돌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제시한 ‘한국전쟁 3단계 작전지침’에도 옹진반도가 등장한다. 스탈린은 “전쟁이 나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20만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단숨에 끝날 것”이라는 김일성의 허풍에 넘어갔다. 그러나 의심 많은 스탈린은 1단계로 38선에 병력을 집결시키되 평화통일을 제의할 것, 2단계로 남쪽이 거부하면 옹진반도를 일단 점령할 것, 3단계 남쪽이 반격하면 그때 전선의 폭을 넓힐 것 등 단계적 전쟁 확대 지침을 제시했다. 전면전이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인 옹진반도를 점령하라는 조건부 전쟁 승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초기 맥없이 무너진 17연대의 옹진반도 패전이 군 사기에 미친 악영향도 무시하지 못 한다.

동서쪽으로 뻗은 옹진반도는 멸악산맥의 지맥이 침강한 길이 58㎞의 리아스식 해안으로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다. 고조선사에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 영토로 이름이 나오며, 삼한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지였다. 삼국사기에는 ‘옹천이 지금의 옹진’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독을 눕혀 놓은 듯하다고 해서 독벼루(甕遷)이고, 독을 엎어 놓은 듯한 나루가 있다고 해서 독나루(甕津)라고 불렀다. 통일신라까지 지명은 주로 옹천이 쓰였다. 475년 고구려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고구려군의 해상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북한군이 무차별 포 공격을 가한 연평도의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이다. 8·15광복 당시 옹진반도는 38선 이남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옹진반도의 대부분은 남한 땅이었고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했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백령도·연평도·대청도·소청도·우도 등 이른바 서해 5도를 제외한 미수복 지역이 북의 수중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북은 혹독한 전쟁을 치른 대가로 요충지 옹진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서해 북방한계선(NLL) 바깥 서해 5도를 우리에게 내줬다. 눈엣가시일 것이다. 연평도와 서해 5도는 옹진반도의 ‘눈’이기 때문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2010-11-2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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