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얻은 순간적인 깨달음 숨겨놓은 詩

삶에서 얻은 순간적인 깨달음 숨겨놓은 詩

입력 2014-06-26 00:00
업데이트 2014-06-2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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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해설로 읽는 하이쿠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의 생애는 불행했다. 노숙자처럼 떠돌다 쉰이 넘어 결혼했지만 아이 넷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신을 원망하지도 절망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유머를 잃지 않았고 여린 것들에 대해선 연민과 애정을 품었다. 그의 하이쿠(俳句)를 류시화(56) 시인은 이렇게 읽어낸다. “잇사는 힘없는 마른 개구리를 응원한다. 힘내라고, 여기 너처럼 말랐지만 널 응원하는 잇사가 있다고. 강자를 선호하는 사회에 허약한 잇사의 개구리가 맞서고 있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잇사 하이쿠의 강점이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자에게 친밀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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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하이쿠를 번역하기 위해 오지 마을 등 시의 현장을 숱하게 찾아다녔다는 류시화 시인은 “나는 시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시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연금술사 제공
계절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하이쿠를 번역하기 위해 오지 마을 등 시의 현장을 숱하게 찾아다녔다는 류시화 시인은 “나는 시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시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연금술사 제공


류시화 시인은 30년 전 하이쿠(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의 일본 정형시)와의 첫 만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시 창작을 돌아보기 위해 몇년간 시 쓰기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일본어를 독학한 것도 순전히 하이쿠를 읽기 위해서였다.

시인이 자신을 사로잡았던 하이쿠의 매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연금술사)에서 그는 하이쿠 1370여편을 직접 골라 번역하고 해설을 들여보냈다. ‘명상의 시인’답게 영원한 것과 찰나의 순간을 동결한 하이쿠를 읽어내는 그의 해설에는 시적 감성과 곰삭은 지혜가 뭉근히 배어 있다. 15년간의 작업은 750여쪽의 책에 고스란히 쌓였다. 450여년 전 태어난 하이쿠인 만큼 에도 시대의 마쓰오 바쇼부터 요사 부손, 잇사, 현대의 이이다 다코쓰, 구보타 만타로, 나카무라 구사타오 등 130여명의 작품을 고루 아울렀다. 150여쪽에 이르는 해설에는 하이쿠의 미학과 역사, 주요 시인 소개뿐 아니라 일본 시가의 탄생에 백제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시인은 “하이쿠는 더 이상 일본만의 문학이 아니라 세계인의 시”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문인들은 ‘숨 한 번 길이만큼의 시’인 하이쿠에 마음을 빼앗겼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를 ‘가까이 하기 쉬운 세계, 그러나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이중의 성격을 가진 독특한 문학’이라고 했다.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하이쿠의 함축미와 선명한 이미지에 충격을 받고 20세기 영미시를 주도한 이미지즘 운동을 일으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도 자국 언어로 하이쿠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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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포착한 하이쿠의 매력은 ‘모습은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추라’는 원칙에서 나온다. 그는 독자들에게 하이쿠는 “촌철살인의 재치나 말장난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은유와 감성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허무, 자연과 계절에 대한 느낌, 삶에서 얻은 순간적인 깨달음을 단어들 사이에 숨겨놓은 시”라고 강조한다.

가끔 ‘왜 일본 문학을 소개하느냐’는 항의도 쏟아진다. 이에 시인은 “하이쿠를 ‘왜색’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감정적 편견을 대입해 문학을 국경선 안에 가두는 짓”이라며 “하이쿠를 소개하는 것은 ‘좋은 문학’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극우 행보를 가속화하는 일본에도 쓴소리를 잊지 않는다. “(동일본 대지진, 경제 악화 등) 불안감과 내부 동요를 만회하기 위해 타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다. 자연 친화적이고, 생명 존중을 바탕에 둔 하이쿠 같은 것에서 위기 극복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중략) 시는 ‘민족’과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에 더 다가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시시한 문장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의아해한다. 그런 이들에게 류시화 시인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첫 만남은 예기치 않게 시작된다. 어느 날 하이쿠가 당신의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당신의 마음과 혼에 스며들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4-06-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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