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 양은 도시락] 그리움의 맛

[속삭임 | 양은 도시락] 그리움의 맛

입력 2010-10-10 00:00
업데이트 2010-10-10 11:15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아빠, 도시락 하나 드릴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도시락이라니?”

손잡아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간 음식점에서 아들녀석이 시켜주는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노란 사각형의 양은도시락을 열어보니 밥 위에 커다란 계란프라이 하나가 얹혀 있고 한쪽에는 맛깔스럽게 익은 김치며 약간의 반찬이 담겨 있다. 예전에 그랬듯이 뚜껑을 덮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이미지 확대


겨울철 나무난로 위에 두 단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던 도시락 대신 가스 불꽃이 파랗게 이는 불판에는 아이들이 굽는 삼겹살이 노릿노릿 익어가고 있다.

주번의 일이었지만 수업을 받다가 적당한 시기에 아래 도시락과 위쪽 도시락의 위치를 바꾸어 놓던, 그리고 서로 도시락을 아래쪽에 놓으려고 다투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겨울이야기. 이제는 삶 저 건너편의 추억이 되어버린 그 작은 도시락이 식당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뚜껑을 열었다. 늘 배고팠던 시절, 하교 시간이면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만든 죽과 건빵, 그리고 분유를 받아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 동생들과 나눠 먹던 기억. 점심시간이면 도시락 뚜껑을 열고 혼식 여부를 검사하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밥 위에 박혀 있는 까만 콩처럼 드문드문 재생된다.

수저를 들었지만 선뜻 떠넣지 못한다. 작은 도시락에 담겨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짧은 슬픔을 동반한 그리움이 도시락에 가득하다.

잘 비벼진 도시락의 밥을 먹었지만 그때 그 맛은 아니다.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먹던 아이가 말을 건넨다.

“아빠 맛있어요?”

지금 내가 먹는 도시락이 그리움의 맛이라는 걸 아이는 알지 못하는 눈치다. 단체 급식으로 학창생활을 보낸 아이의 기억 속에는 도시락이 없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가 태반이었다가, 양은도시락이었다가, 보온도시락에서 단체 급식으로 바뀐 점심시간의 추억을, 아이는 스테인리스 식판 하나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담임선생님의 혼식 검사 때 떨리는 손으로 열어 보이던 꽁보리밥 도시락의 맛을 아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글·사진_ 문근식 시인
많이 본 뉴스
국민연금 개혁, 당신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4%’를 담은 ‘모수개혁’부터 처리하자는 입장을, 국민의힘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각종 특수직역연금을 통합하는 등 연금 구조를 바꾸는 ‘구조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모수개혁이 우선이다
구조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