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에선 무슨 일이…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에선 무슨 일이…

입력 2010-08-21 00:00
업데이트 2010-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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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융희(隆熙) 4년이었다. 대부분 백성들은 그냥 경술년이라 불렀고, 뒷날 서기년도를 본격 도입하면서 1910년으로 기록했다.

허나 한동안 신문, 자료 등 여러 기록에서는 그해를 메이지(明治) 43년으로 표기했다. 백중도 지나갔건만, 여름 막바지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그해 8월22일 ‘국치의 날’ 이후부터였다. 꼬박 100년 전 그날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한합방조약’이 체결됐다. 무력한 나라의 가여운 백성들은 하루 아침에 나라를 잃고 황국의 신민이 되고 말았다. 그날 오후 2시 서울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 안건은 단 하나였다.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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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의 서명이 이루어진 서울 남산 왜성대의 통감관저 전경. 1906년 11월3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초대된 소학교 어린이들이 이토 히로부미 당시 통감의 훈시를 듣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의 서명이 이루어진 서울 남산 왜성대의 통감관저 전경. 1906년 11월3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초대된 소학교 어린이들이 이토 히로부미 당시 통감의 훈시를 듣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순종과 총리대신 이완용은 물론,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이재곤,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등 각료들과 왕족 대표 이재면, 원로 대표인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참석했다.

회의 자리는 침울했다. 순종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각료들도 쉬 입을 떼지 못했다. 침묵은 길었고 더위에 지친 매미만 흥복헌 바깥에서 아우성을 쳐댔다.

이완용이 5년 전 1905년 을사조약 당시의 ‘활약’에 이어 다시 한 번 나선다. 합방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동안 일본과 교섭한 내용 등을 한 시간 가까이 설명했고, 이미 닷새 전 이완용이 모두 손을 써 놓았던 나머지 각료들은 모두 마지못해 “옳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순종은 이완용의 발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3시가 조금 넘어갔다. 마침내 순종은 “권신이 모두 가(可)하다면 짐도 이의가 없다. 동양평화를 위해 기쁜 일이다.”며 조약에 관한 전권을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완용은 위임장을 들고 지체 없이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있는 통감관저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데라우치와 함께 합방조약을 체결했다.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자축했다. 숱한 외적의 침입과 전란 속에서도 지켜온 나라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10년 8월22일 월요일 오후 5시였다.

이날 서울 거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은 저녁 헌병사령관 아카시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해 취재 라인이 사실상 봉쇄됐다. 거리를 순찰하는 헌병과 경찰의 눈초리는 더욱 엄중해졌지만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는 어떤 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외교권 박탈은 물론,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까지 넘겨주는 등 합병의 수순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 가슴 속에 쌓인 체념은 이미 컸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겪은 혼란과 불안감, 전민족적 항거를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일주일 동안 이를 공포하지 않은 채 물밑 작업을 벌였던 점도 평온한 분위기 조성에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예비검속이 단행됐고, 수천명의 항일인사가 체포됐으며, 어지간한 민족주의 단체는 대부분 해산당했다. 모든 저항의 싹을 잘라낸 뒤, 8월29일 일본의 강제 병합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순종은 끝끝내 조인된 조약서에 국새를 찍지 않는 소극적 방식으로나마 저항했지만 일본의 강제 병합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훗날 국제법상 불법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라도 남겨 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날의 공로로 이완용은 훈1등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고 은사금 15만원을 ‘하사’받았다. 36년의 일제 강점이 사실상 시작된 날은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짜릿한 기쁨으로, 누군가에게는 무기력한 체념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일상 속에서 저물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010-08-21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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